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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문장들

[문장모음]노름꾼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 열린책들 / 밀리의 서재

(p.57-58) '그럼 당신은 여태껏 룰렛이 당신의 유일한 탈출구이자 구원이라고 믿고 있었단 말인가요?' 그녀가 비웃듯이 물었다. 나는 다시 한번 아주 심각하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반드시 돈을 따게 될 것이라는 내 믿음을 가소롭게 봐도 좋고, 또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제발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이다.

(p.93-94) 자, 정말이지 장엄한 광경 아닙니까? 이건 그야말로 1백 년 아니 2백 년이나 이어져 내려오는 기질, 노력과 인내, 지혜와 청렴함, 강인함과 검소함, 그리고 지붕 위에 황새란 말입니다! 이제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런 관점에서 온 세상을 판단하기 시작하고 죄 많은 사람들, 그러니까 자신들을 조금이라도 닮지 않은 사람들을 당장에 처형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차라리 러시아 식으로 추하게 놀아나는 것이 나을 성싶고, 그게 아니면 룰렛으로 돈벌이를 하고 싶습니다. 다섯 세대 후의 호프 가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p.112) 나는 모든 형식을 잊어버렸습니다. 형식뿐만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가치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것에 대해 당신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형식이 지니는 가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세요. 이제 모든 것은 중단되었습니다. 왜 그런지는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나의 머릿속에는 인간적인 사고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러시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오래전에 알았어요.

(p.411-413) 검은색이 나왔다. 이제 나는 계산도 잊어버렸고 돈 거는 체계도 깡그리 잊어버렸다. 단 하나 기억하는 것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벌써 1만 6천 플로렌을 땄다는 것이다. 곧이어 세 번을 걸었는데 운이 따르지 않아 1만 2천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 다음에 나는 마지막 남은 4천을 <파스>로 옮겨 걸었고(나는 이제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무의식 속에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기다리기만 할 뿐이었다) 다시 한번 승리를 했다. 나는 연달아서 네 번을 더 이겼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저 수없이 많은 돈을 긁어 모았다는 것과 또 한 가지, 가운데의 12가 제일 많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나는 바로 그 12를 물고 늘어졌다.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숫자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나오고 있었다. 반드시 서너 번을 연달아 나오다가 그다음에는 두 번 정도 안나오고, 또 그다음에 서너 번을 연달아서 나왔다. 게다가 이런 놀라운 규칙성이 연속적으로 나타날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러니 손에 연필을 쥐고 계산을 하고 있던 이름난 노름꾼들도 그런 상황을 놓고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가끔 이곳에서는 뜻하지 않게 너무나 무시무시한 운명의 장난이 벌어지는 것이다!

(p.449-450) 맹세하건대 난 뽈리나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내가 도박에 손을 대고 돈 다발들을 긁어 모으던 그 순간부터 어쩐 일인지 나의 사랑은 뒷전으로 밀려난 것 같았다. 지금이야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이 모든 사정을 똑똑히 알지 못했다. 내가 정말 노름꾼일까? 내가 정말...... 정말 그렇게까지 괴상한 사랑을 했던 것일까? 아니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아마 신도 아실 것이다. 미스터 에이슬리의 방을 나와 집으로 향하고 있던 나는 진심으로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쳐 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하지만 바로 그때 내게는 너무도 이상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p.500)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회전판이 한 번 돌게 되면 모든 것이 뒤바뀌게 된다는 것인데, 이때 바로 그 도덕주의자들이 제일 먼저(나는 이것을 믿는다) 허물없는 농담을 하면서 나를 축하해 주러 올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나를 외면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들에게는 온통 침을 뱉어 줘야만 한다! 지금의 나는 과연 무엇인가? 제로다. 내일이면 뭐가 될 수 있을까? 내일 나는 죽은 자들 사이에서 되살아날 수 있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내 속에 있는 인간이 사라져 없어지기 전에 난 그 인간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p.514-515) "당신은 감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은 삶도 거부했고, 자신과 사회의 이익도 거부했고, 시민과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의무도 거부했고, 자기 친구도 거부했습니다. 당신에게는 어쨌든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을 따는 것 말고는 그 어떠한 목표들도 단념했고, 심지어는 자신의 추억까지도 단념하고 말았습니다. 전 당신이 삶의 치열하고 힘찬 순간들을 살아가던 때를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 시절에 자신이 가졌던 훌륭한 인상들을 당신은 모두 잊어버렸어요. 이제 당신의 꿈과 절실한 희망이란 고작 홀수와 짝수, 검은색과 빨간색 그리고 가운데 열두 숫자들 같은 것들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렸어요. 전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p.529-530) 맞아요, 당신은 스스로를 망쳐 버린 것입니다. 사실 당신은 약간의 재능도 가지고 있었고 성격도 발랄했고, 또 괜찮은 사람이었지요. 심지어는 당신의 조국, 인재를 부르고 있는 당신의 조국에도 이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여기에 눌러앉아 버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신의 인생도 막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난 당신을 탓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러시아인들 모두가 그렇습니다. 아니면 그렇게 되기가 쉽든지요. 룰렛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비슷한 다른 것이 또 있을 거예요. 예외란 아주 드문 경우입니다. 도동이 무엇인지(난 당신 민족에 대해서 애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은 아닙니다. 룰렛은 주로 러시아에서 볼 수 있는 도박입니다. 당신은 지금껏 정직했어요. 도둑질을 하느니 차라리 하인이 되려고 했단 말입니다......"

(p.532) 새롭게 태어나고 부활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아직 사람답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뽈리나가 알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되는 것을...... 어쨌든 이제는 늦어 버렸다. 그렇지만 내일은...... 아, 나는 예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예감이 빗나갈 리 없다! 지금 내게는 15루이도어가 있지만 정말이지 처음에는 15굴덴으로 시작하지 않았던가! 조심해서 다시 시작해 본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