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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문장들

[문장모음] 모순 / 양귀자 / 쓰다

(p.21) 그랬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내 삶에 대해 졸렬했다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p.94-95)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이 저켠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가슴만 아픈 게 아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 안진진, 환한 낮이 가고 어둔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혹시 맡아본 적 있니?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른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 집 냄세는 어디선가 풍겨 오고. 그러면 그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거기가 어디든 달리고 달려서 마구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나는 끝내 지고 마는 거야......"

(p.127)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p.152)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p.161) 내가 참지 못했던 것은 키스가 아니었다. 그때 이후 시시때때로 눈앞에서 나부끼는 나영규의 인생계획서, 그것이 문제였다. 그것은 이제 자동화면으로 내 머릿속에 장착되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하면 자동적으로 머릿속의 기계가 스스륵 돌아가면서 행동지침이 세밀하게 적혀있는 그 날짜의 나영규 인생계획서가 화면에 확대되는 것이었다.

(p.178) 그건 옳지 못한 거야, 라는 주리의 관용구. 주리는 바로 그 관용구 밑에 숨어서 더 이상은 세상 속으로 나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주리는 내 아버지를 킹콩으로 비유했던 그 어린 시절에서 한 발자국도 성장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주리를 그만 이해하기로 했다. 탐험해봐야 할 수많은 인생의 비밀에 대해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주리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었다. 그것 또한 재미있는 이생의 비밀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말이다.

(p.190) 어디 그것뿐이었을까. 하염없이 반짝거리는 녹색 물결을 끼고 달리는 해안도로의 절경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숨막히는 비장미를 뿜어내고 있었다. 우리는 묵묵히 너무도 아름다워서 울고 싶은 풍경 속을 뚫고 달렸다. 저 바닷속으로 이 지프가 굴러 들어가도 무방해... 이 고단한 생애를 등지고 물결의 포말이 되어도 상관없어... 정말 괜찮아......

(p.229)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 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p.231) "그 사람은 내가 그렇게 맛있어 했던 스파게티를 어디서 먹었는지 기억하지 못해. 니네 이모부는 사진들이 나란히 붙어있는 앨범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대지."

(p.268) 나는 이런 말을 알고 있다. 인생은 짧다고, 그러나 삶 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고. 아버지는 참으로 긴긴 인생을 살았다. 그것이 진정 아버지가 원했던 삶이었을까.

(p.296)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