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41) 에드가 선생은 사랑하는 인간, 그리고 인간의 사랑을 사랑에 속한 인간으로 만듦으로써, 사랑을 인간에게서 격리시켜 그 자체로 독립된 실체로 만듦으로써 '사랑'을 '여신'으로 그것도 '잔인한 여신'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p.59) "소유적 인간"은 자기가 가진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적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 기탄없이 응답할 용기만 지니면 새로운 무엇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고수하려고 전전긍긍하느라 거리끼는 일이 없기 때문에 대화에 활기를 가지고 임한다. 그의 활기가 전염되어 대화의 상대방도 흔히 자기 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이야기판은 상품(정보, 지식, 지위)을 교환하는 장터이기를 중단하고, 누가 옳은가는 이미 문제가 되지 않는 진정한 대화의 마당이 된다.
p.91) 이 이야기에서(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장면) 예수와 마귀는 대립적인 두원칙을 대표한다. 마귀는 물질적 소비와 자연 및 인간을 지배하는 힘의 대표자이다. 반면 예수는 존재의 구현이며, 소유하지 않는 것이 존재양식의 전제라는 이념의 구현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복음시대 이래 마귀의 기본 원칙을 추종해왔다. 그러나 아무리 이 원칙들이 개가를 올린다고 해도, 예수를 비롯해서 그를 전후한 위인들이 말했던 참존재의 실현에 대한 염원을 꺼버릴 수는 없었다.
p.97) 에크하르트는 훨씬 더 멀리까지 파고든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되풀이하거니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지금껏 우리는 인간은 모름지기 자신을 위해서나 진리를 위해서나 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거듭 말해왔다. 이러한 가난을 가지려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나 진리를 위해서나 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신이 자기 안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인식하지도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그렇게 모든 지식을 비워버려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내면에 살아 있는 일체의 인식도 비워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아직] 신의 영원한 존재 안에 들어서 있었을 때는 인간의 내부에는 다른 무엇도 살아 있지 않았고, 거기에 살아 있던 것은 인간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한다. 인간이여, 그대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대의 지식을 비워버리라. 그리고 신이 뜻하시는 대로 역사하시게 하며, 그대의 마음을 비우라
p.101) 에크하르트가 말하난 존재의 두 번째 의미는 한결 더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다. 존재는 삶이며 활동이요, 탄생이며, 재생이고, 흘러나와서 흘러가는 것이며, 생산활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는 소유, 아집, 아욕의 반대개념이다. 에크하르트가 의미하는 존재는 인간이 지닌 고유한 능력의 생산적 표출이라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능동적 활동상태이며, 현대적 의미에서의 "바쁘다"라고 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그에게 능동적 활동이란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을 그는 여러 가지 비유로 묘사한다.
p.111-112) 젊은 세대들에게서 우리는 소유와 취득으로 감추어진 형태가 아닌 적나라한 소비습관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에게 소비란 즐겨 행하는 활동 자체에 대한 순수한 기쁨의 표출일 뿐, 무슨 "지속적" 대가에 대한 기대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로지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서, 보고 싶은 장소를 보기 위해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장거리 여행을 감행한다. (중략) 이들 젊은이들은 과감히 존재하려고 할 뿐, 그 보상으로 무엇을 얻을지 무엇이 남을지를 문제 삼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그들의 앞 세대보다 훨씬 더 솔직해 보인다. 그들의 철학적 및 정치적 신념은 흔히 순진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자기 자신을 시장에서 탐나는 "상품"으로 내놓으려고 끊임없이 갈고 닦는 일은 하지 않는다. (중략) 그러나 이와 같은 긍정적 그림은 자격을 요구한다. 바로 이 젊은이들의 대부분은 "ㅡ로부터의 자유"를 구가하기는 했지만 "ㅡ를 향한 자유"로의 도약을 이루어내지는 못했다. 제한과 의존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소망 말고는 자기들이 향해야 할 아무런 목표도 추구하지 않은 채, 오로지 반항만 한 것이다.
p.116) 소유적 실존양식에서는 나와 나의 소유물 사이에 살아 있는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소유물은 물론 나도 사물이 되며, 내게 그것을 소유할 가능성이 주어졌기 때문에 지금 나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관계도 있을 수 있어서, 그것이 나를 소유하기도 한다. 내가 나 자신임을 확신하는 느낌이나 나의 심리적 건강이 "그것"과 가능한 한 많은 사물을 소유하는 데에 의존하는 경우이다. 이렇듯 소유적 실존양식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살아 있는 관계나 생산적 과정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를 사물로 만든다. 그 관계는 죽은 것이며, 살아 있는 관계가 아니다.
p.150) 그러나 참사랑은 사랑하는 능력과 타인에게 무엇인가 베푸는 능력을 배가시킨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전 세계인을 사랑하게 된다. 적지 않은 사람들, 주로 젊은이들 가운데에는 자신이 태어난 부유한 환경을 둘러싼 사치와 이기심을 참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자식들은 "원하는 바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부모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이 젊은이들은 고립된 삶, 생명없는 삶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실제에 있어서 그들은 "원하는 바를 모두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동경하고 있기 때문이다.
p.154) 이 고찰들은 인간의 내부에는 두 가지 성향이 있다는 결론을 허용한다. 그 하나는 소유하고자 하는, 자기 것으로 하려는 성향으로서 궁극적으로 살아남고자 하는 생물학적 소망에서 뻗어나온 힘이다. 다른 하나는 존재하고자 하는, 나누어가지고 베풀고 희생하려는 성향으로서 인간실존의 특유의 조건에서, 특히 타자와 하나가 됨으로써 자신이 고립을 극복하려는 타고난 욕구에서 나온 성향이다. 모든 인간의 내부에는 이 두 가지 상반된 성향이 있으므로 사회의 구조와 가치, 그리고 규범은 두 가능성 중에서 어느 한쪽을 우세한 것으로 보는 입장응 취하게 된다. 소유지향, 즉 소유적 실존양식을 조장하는 사회는 인간의 전자의 잠재성에 근거하며, 존재와 나눔을 장려하는 사회는 인간의 후자의 잠재성에 근거한다. 우리는 이 두 잠재성 가운데 어느 것을 개발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며, 아울러 우리의 결정은 그 어느 한쪽 성향으로의 해결을 조장하는 우리 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에 상당 부분 달려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p.179) 어떤 죄가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었는가? 그 원인은 그들이 서로 분리되고 고립된 이기적 인간으로, 사랑의 결합행위로 소외를 극복 할 수 없는 인간으로 맞서 있었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죄는 인간의 실존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연과의 근원적인 조화를 상실한 까닭에, 인간은 모든 타인과의 총체적 소외감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이와 같은 실존형태(사랑의 가교 없이 완전히 고립되고 소외된 상태를)를 "지옥"이라고 정의한다. 이 상태는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절대적 고립의 고통을 극복해야 한다. 굴복하든 지배하든, 또는 이성과 의식을 잠재우려고 시도하든 간에, 그러나 이런 식의 노력은 일시적인 성공을 보장할 뿐, 진정한 해결에 이르는 길을 오히려 가록막는다. 이 지옥에서 스스로를 구제하는 가능성은 단 한 가지, 자기 중심의 감옥을 깨고 나와서 손을 내밀어 "세계와 하나"가 되는 길뿐이다.
p.185-187) 존재는 반드시 시간의 외각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존재를 지배하는 차원은 아니다. (중략) 사랑의 체험, 기쁨의 체험, 어떤 진리를 발견하는 체험은 시간 안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다. 이와 같이 지금, 여기는 영원에 다름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초시간적인 것이다. 영원이란 우리가 흔히 잘못 생각하듯이, 무한으로 연장된 시간이 아닌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 즉 모든 시간개념은 우리의 육체적 실존으로 인한 불가피한 요소이다. (중략) 이 모든 요인들은 우리에게 살고 싶으면 시간을 존중하기를 강요하며, 우리의 육체 역시 우리가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시간을 존중하는 것과 시간에 굴복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존재적 실존양식에서 우리는 시간을 존중하되 시간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유적 실존양식이 지배할 때는 시간에 대한 존중이 굴복으로 변한다. 이 양식에서는 비단 물이 물일 뿐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이 물화된다. 소유적 실존양식에서는 시간이 우리의 지배자이다. 반면, 존재적 실존양식에서는 시간이 옥좌를 떠난다. 시간은 이미 우리 삶을 지배하는 폭군이 될 수 없다.
p.205) 예수를 위대한 박애자로, 자기를 희생하는 하느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은 예수가 자신들을 대신하여 사랑하고 있다는 일종의 망상으로 이 믿음을 소외시킬 수 있다. 그럴 때 예수는 우상이 되며, 예수에 대한 믿음은 자기가 실천해야 할 사랑의 행위의 대용물이 된다. 이 무의식적 공식을 단순화시켜서 말하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한, 우리는 그리스 영웅의 본을 따라 계속 살아갈 수 있고 그럼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소외된 '믿음'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행위를 대신하고 있으니까."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자기 탐욕을 은폐하는 싸구려 구실이 되어왔고 지금도 그렇다는 점은 자명한 일이다. 그럼에도 결국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에게 천성적으로 갖추어진 것이므로 인간이 늑대처럼 행동할 때는 필연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게 마련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사랑[그리스도]에 대한 명목상의 믿음이 실제 사랑의 부재상태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적인 죄책감 및 고통을 상당 부분 마비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p.212) 시장적 성격구조를 가진 사람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만사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행하는 것 말고는 다른 아무 목표도 가지고 있지 않다. 왜 만사를 그토록 신속히 능률적으로 해치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그들에게 해본들 진정한 대답을 들을 수는 없고, 다만 "더 많은 공장을 짓기 위해서"라든가 "회사를 확장하기 위해서"라는 식의 합리화된 대답을 들을 뿐이다. 왜 인간은 사는가? 왜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고 이쪽 방향으로 가는가? 이러한 철학적 또는 종교적 문제에 대해서 그들은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거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항상 변하는 큼직한 자아를 가지고 있으되, 그들 가운데 어느 한사람도 진정한 자아, 하나의 심지, 자아의 실체적 체험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현대사회의 "자아의 실체성(Identity)의 위기"는 그 구성원들이 자아를 상실한 도구들로 변해버려서, 대기업(또는 거대하게 부풀려진 다른 관료조직)에 속해 있는 것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밖에 없게 된 사실에 근거한다. 참된 장나가 실재하지 않는 곳에는 자의 실체도 있을 수 없는 법이다.
p.214) 순전히 과학적으로 소외된 지능이 한 인간의 인품에 초래할 수 있는 비극적 결과를 제시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찰스 다윈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기는 30세까지 음악, 문학, 조각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즐겼지만, 그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이 모든 것에 대한 관심과 취미를 잃어버렸노라고 쓰고 있다. "나의 정신은 엄청난 양의 사실들에서 일반적인 법칙을 찍어내는 기계가 되어버린 것 같다...... 이런 취미들의 상실은 곧 행복의 상실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상실은 우리 본성의 정서적 측면을 약화시킴으로써, 지성을 해치고 나아가서 도덕적 성격까지 해칠 수 있을 것이다.
다윈이 여기서 묘사한 과정은 그의 시대 이후 지금까지 급속도로 진척되어 이제는 두뇌가 심장에서 거의 완전히 떨어져나갔다. 흥미로운 점은 가장 엄밀하고 혁명적인 분야(예를 들면 이론물리학)에 종사하는 다수의 주도적 과학자들이 이와 같은 이성의 위축에서 제외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철학적 및 종교적 문제에도 깊이 몰두한 과학자들이었다(아인슈타인, 보어, 츨라드,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같은 과학자들을 생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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