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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나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경비원 입니다 / 패트릭 브링리 / 웅진지식하우스


멀리서 보면 그림, 가까이서 보면 이야기
 
 
  어릴 때 미술수업 시간을 싫어했다. 새하얀 도화지에 연필로 점 하나 찍는 것도 어려운데, 알록달록 단풍으로 물든 가을 풍경을 그리라는 과제를 받았을 때 내가 느꼈던 막막함이 떠오른다. 아름다운 산과 태양과 광활한 하늘을 아무리 바라봐도 도저히 어떤 것을 그려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나는 미술에 소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아이가 다니는 미술학원의 그림들을 바라보면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침없이 또렷하게 표현하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나도 마음 안에 존재하고 있을 것 같은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그림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겨난 호기심으로 그림에 대한 무지를 조금이나마 채워보려고 이 책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친절한 이야기들이 나를 작품 앞에 데려다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작품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 또는 그것 앞에 마주하는 삶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곳은 미술관인지, 아니면 시간의 조각들을 모아놓은 삶의 현장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멀리서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명화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찬란한 삶의 이야기들이 빼곡히 박혀있었다. 
 
 
 
 
  저자는 젊은 시절 사랑하는 형을 잃었다. 그것이 잘 가고 있던 인생의 진로를 멈추게 했다. 아마 이 책은 그의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수습이 되고 난 후 썼던 것 같다. 덤덤하게 써 내려가는 형의 병간호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오히려 그 상실감과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어느 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 그 시간, 고요를 찾아 떠났던 한 미술관에서 회색빛의 차가운 예수의 몸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처연하게 바라보는 성모마리아를 마주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된다. 

무덤의 예수와 성모(1377). 니콜로 디 피에트로 제리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심장이 부서지는 동시에 충만해져서 그렇게 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림이 어머니 안의 사랑을 깨워서 위안과 고통 둘 다를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경배'를 할 때 아름다움을 이해한다. '통곡'을 할 때 '삶은 고통이다'라는 오래된 격언에 담긴 지혜의 의미를 깨닫는다.(p.67)

 
  그녀는 무엇을 보았을까? 고통의 렌즈는 연민을 담아낸다. 아마 자신의 아픔도 연민으로 바라봤으리라 생각한다. 처연한 그림과 저자의 어머니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그 장면을 그려보게 된다.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나는 자꾸 눈물이 났다. 그녀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지만, 나 역시 고통을 안고 있는 엄마의 마음으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그림을 통해 들여다보고 위로받는 이 장면으로 나는 저자가 느꼈을 법한 슬픔과 고통을 가장 아프게 공감할 수 있었다. 
 
 
 
 
  책에는 많은 작품과 예술가들이 소개된다. 그중 많은 공간을 할애하여 소개된 미켈란젤로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최고의 거장의 기획전을 경비하게 된 그는 습작용 스케치를 보게 된다. 그 스케치에서 거장이라는 거리감보다는 자신의 삶에 성실하려고 애를 썼던 한 인물을 상상한다.

사랑과 경건감 그리고 기진맥진한 몸과 마음을 표현한 그 소묘들을 다시 바라본다. 그리고 머리와 심장의 요구에 손으로 부응하려 애를 쓰며 하얀 종이 앞에 구부정한 몸으로 앉아 있는 노인을 상상한다. 미켈란젤로를 미켈란젤로로 만드는 건 그다음에 그가 한 일이다. 습작을 해본 다음 그는 일어나서 그 스케치를 현실화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는 죽기 며칠 전까지도 말을 잘 듣지 않는 대리석을 망치와 끌로 두드리고 있있었다.(p.292)]

 
  저자는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을 들여다보며, 거장이 되기까지 그가 느꼈을법한 열등감과 그에 따른 고통을 이해한 것 같다.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는 불완전성을 극복하기 위해 죽기 전까지 작품에 몰두하는 노장의 모습이 연상돼서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영광은 사는 동안에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삶이 끝나고 난 후 남겨진 이야기들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미술관에서 근무하는 많은 동료들 가운데 조셉은 그와 같은 삶의 좌절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토고에서 온 그는 월스트리트에서 근무하다 죽음의 문턱을 넘고 온 사람이었다. 목숨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기존에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없었던 그는 이 미술관에 오게 되어 저자를 만난다. 이 책의 마지막에 그는 윈슬로 호머의 '멕시코 만류(1988)'라는 작품을 보며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멕시코 만류(1988). 윈슬로 호머
"여기서 4년 정도 더 일을 할 예정이야." 그가 단호하게 말한다. "그런 다음 은퇴를 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으로 갈 거야. 가나에 있는 마을인데 우리 어머니의 고향이지. 거기서 뭘 할 거냐고? 잠에서 깨면 어부들이 뭘 잡았는지 보고, 마음에 드는 물고기가 있으면 사고, 그렇지 않으면 사지 않을 거야. G구역에 있는 윈슬로 호머 그림 알지? 뗏목 위에 누워 있는 흑인. 뗏목 주변으로 상어들이 빙빙 돌고 있고, 저 멀리서 태풍이 불어닥치고 있지만 그 사람은 이미 최악을 경험한 사람이라 그냥 이렇게 하고 편히 쉬고 있잖아." 조셉이 그의 포즈를 따라 하며 말한다. "그게 바로 나야. 너무 오랫동안 안전하게만 살아왔어. 케세라 세라. 하지만 우리 젊은 친구, 패밀리 맨, 자네는 세상으로 나가서 큰돈을 벌어. 혹시 그렇게 못 한다 하더라도 누가 뭐라 하겠어?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있잖아! 이미 잘하고 있는 거야! 올리가 흠, 열두 살, 위지가 열 살 정도 되면 가나로 놀러 와.(p.316)"

 
  조셉은 저자와 결이 비슷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미건조한 어투로 자신이 맞았던 총알의 개수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덤덤한 말에서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가늠했을 것이다. 그랬던 그의 마지막 인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찾은 삶의 활력이 반가웠기 때문 아닐까. 그림의 남자처럼 이미 최악을 경험한 두 사람은 자신의 삶에 찾아올 혹시 모를 어려움에도 의연해질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이 찾게 될 진정한 의미와 행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사를 읽으며 그들의 삶을 응원한다. 
 
 

곡물수확(1565). 피터르 브뤼헐 더 아우더


 

  브뤼헐의 이 명작을 바라보며 나는 가끔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흔한 광경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지었고 그들 중 대부분이 소작농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평생 노동을 하고 궁핍한 삶을 살아가면서 가끔 휴식을 취하고 다른 이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너무도 일상적이고 익숙한 광경을 묘사하기 위해 피터르 브뤼헐은 일부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광활하게 펼쳐진 세상의 맨 앞자리를 이 성스러운 오합지졸들에게 내주었다.
  가끔 나는 어느 쪽이 더 눈부시고 놀라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위대한 그림을 닮은 삶일까, 아니면 삶을 닮은 위대한 그림일까(p.162).

 
  저자의 친절한 해석 덕분에 나는 이 책에서 소개된 것 중 이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 그림 안에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지 상상해 보았다. 내가 하고 있는 이야기와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속상했던 이야기, 기뻤던 이야기, 화가 났던 이야기, 슬픔의 이야기. 오고 가는 이야기들 속에서 그들은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기쁨과 평안을 먹었을 것이다. 광활한 대지 가운데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행복들은 그런 것들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어떤 훌륭한 풍경보다도 난 이 사람들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 예술이고, 그 작품 앞에서 더 아름다운 현재의 삶들이 모여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작품에 비추고 있다고. 저자의 질문에 나는 대답한다. 그림보다 삶이 더 아름답다. 사람이 꽃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그 찬란한 삶들을 진심으로 눈물 나게 사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