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친가에서 나를 낳고 키우셨다. 나는 첫 손주였고, 북적거리는 가족 안에서 사랑을 듬뿍받고 자랐다. 그러다 연년생 동생이 태어나고, 세살 터울 막내가 태어나면서 우리가정은 독립하였다. 먹고 살기가 바빴던 부모님은 우리들을 양가 어른들에게 각각 맡기셨다고 한다. 나는 친가에 맡겨졌다. 아주 어릴 때 이지만 몇가지 기억들은 남아있다. 시장 좌판에서 생선을 파시던 할머니가 썰어주시던 은빛 물오징어회의 달큰하고 고소한 맛. 자꾸 사라지는 나를 기둥에 고무줄로 묶어두셔서, 탄성을 온몸으로 느끼며 달렸던 놀이. 유치가 흔들려 공포에 떠는 나를 달래며, 재빨리 내 이마를 탁 치며 이를 뽑아주시던 할머니의 얼굴. 주섬주섬 꺼내주시는 오백원을 냉큼 받아들고 건너편 분식집에서 먹었던 떡볶이와 어묵.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의 조각들이다.
6살 즈음 학교갈 나이가 되자 나는 준비도 없이 할머니와 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나에게 할머니는 엄마같은 존재였다. 집에 와서 며칠을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많이 울었다고 한다. 방학이 되면 할머니 집에 맡겨졌는데 그때도 헤어짐이 힘들어서 집으로 돌아와 수화기를 붙들고 한참을 꺽꺽거리며 울었다. 이 소설의 어린 소녀가 킨셀라 아저씨와 이별하는 장면에서 어릴때 기억이 문득 스쳤다. 어린 소녀가 킨셀라 부부와 헤어질 때의 감정을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녀가 불렀던 아빠는 누구였을까.
소설 속 어린 소녀의 모든 행동에는 깊은 체념과 조심스러움이 묻어있다. 감정을 밖으로 꺼내어 표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소녀가 선택한 것은 내면이 아닌 바깥을 살피는 일이었다. 우물에 가자는 에드나 아주머니에게 이것이 '비밀'인지를 물었을 때 아줌마의 감정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이 아이의 마음 속에 얼마나 많은 비밀과, 옳지 못한 감정들이 담겨있을까. 킨셀라 부부의 집에 맡겨진 시간동안 소녀도 반짝거리는 기억들을 만들어간다. 엄마가 다섯째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을 정도로 많은 형제를 지닌 소녀는, 오히려 맡겨진 집에서 따뜻함과 평온을 느끼게 된다. 그랬던 소녀가 킨셀라 부부의 집에서 다른 비밀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때는 숨기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이방인처럼 원가족들을 둘려보며 연신 코를 푸는 소녀는, 킨셀라 아저씨의 자동차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 먹먹함을 느낀다. 그제야 소녀는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고 꺼낼 수 있는 용기를 낸다.
독자들의 바람을 채워주지 않는 헛헛한 결말로 마무리 되는 소설 때문에 처음에는 그저 가만하게 책장을 덮었다. 그저 소녀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작가는 불편한 것들을 아이의 시선으로 더 불편하게 전달하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소녀가 자동차를 향해 달리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소녀가 가장 잘하는 일이 된 달리기. 이해할 수도 없고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더이상 체념하지 않고 달려가서 부딪힐 수 있는 앞으로의 소녀의 삶을 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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