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주자
해는 그의 어린시절 감옥으로 들어가버렸네
- 자크 프레베르, <새의 선물> 전문 -
책을 읽을 때 제목을 보고 그 의미를 유추해내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어디에도 새는 나오지 않는다. 전문에 짧은 시 한 편만 소개되어 있을 뿐. 작가는 왜 새의 선물이라고 제목을 정했을까. 소설을 읽은 후 나름의 생각을 정리 해보았다.
은희경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어보았다. 다양한 인물들이 보여주는 스토리도 너무 재미있었지만, 작가의 필력을 보여주는 문장들이 진희의 시점에서 살아있는 캐릭터들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주인공 진희는 매우 시니컬 하지만, 결코 시니컬 하지 못한 그 시절의 풍경과 인물들의 관계와 심리들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나는 삶을 너무 빨리 완성했다.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목록을 다 지워버린 그 때,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소설 속 주인공인 진희는 열두 살 이후 성장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진희에게 성장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소설의 마지막 삼십 대의 진희는 여전히 자신의 삶과 거리를 두는 냉소적 태도로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래서 나는 그 문장이 역설적으로 들렸다. 진희는 그때 가졌어야 했던 순수한 동심을 이미 잃어버릴 만큼 너무 많은 것을 봐 왔던 것이 아니었을까. 삶은 아름답지 않다는 것. 아무리 갈구하고 받아도 채워지지 않았던 양육자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 이모에 대한 은근한 시샘과 경쟁, 우물을 둘러싸고 살고 있는 많은 어른들의 그렇지 못했던 모습들과 애환들. 진희는 아이로서 누렸어야 했을 세상에 대한 기대를 너무 빨리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진희는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서 살았다. 그렇게 자신을 분리해서 세상으로부터 진짜 자기인 '바라보는 나'를 지킬 수 있었다. 아이는 그럴 필요가 없다. 어떤 모습이든 아이라서 이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희는 그럴 필요가 있었다. 진희의 입장에서 동심을 잃는다는 것, 성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심각하지도 않고 비루하지도 않은 진희의 어릴 적 그 무채색의 일과들이 쥐꼬리 같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쥐꼬리라면 새로운 것이, 경이로운 것이 더 이상 있겠는가.
해바라기는 해를 보아야 꽃을 피울 수 있다. 새는 해바라기 씨앗을 주고 갔지만, 해는 어린 시절의 감옥으로 들어가 버렸다. 꽃을 피우기 위해 그는 가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로 가야 한다. 새가 처음부터 피어있는 꽃이 아닌 씨앗을 선물해 준 이유는, 그 시절 성장하지 못하고 상처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구해주라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진희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아니고, 성장할 기회를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의 선물은 해를 바라보고 찬란하게 피어나고자 하는 자신의 성장을 독려하는 용기가 아니었을까. 나의 어릴 적도 암울한 그림자들이 있다. 어려서 나라의 미래라고 늘 독려받던 그 응원의 말들이, 어느 순간 빛바랜 사진처럼 사진첩 속에 잠들어 있지는 않은가 하고 돌아보게 되었다. 삼십 대의 진희가 이제라도 잃어버린 성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새의 선물을 들고 어린 시절로 용기 있게 들어가기를 응원한다.
https://pys2582.tistory.com/m/86
[문장모음] 새의 선물 / 은희경 / 문학동네
(p.13-14) 그때 1969년 겨울, 나는 조그만 좌식 책상 앞에 앉아서 '절대 믿어서느느 안 되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목록을 지우고 있었다. 동정심, 선과 악, 불변, 오직 하나뿐이라는 말, 약속...... 마침
pys2582.tistory.com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팩트풀니스(Factfulness) / 한스 로슬링, 올라 로슬링, 안나 로슬링 뢴룬드 / 김영사 (1) | 2025.12.16 |
|---|---|
|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 리사 펠드먼 배럿 / 더퀘스트 (0) | 2025.10.27 |
| 이반 일리치의 죽음 / 레프 톨스토이 / 민음사 (0) | 2025.07.14 |
| 맡겨진 소녀 / 클레어 키건 / 다산책방 (0) | 2025.07.08 |
|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 / 문학동네 (3) | 2025.06.19 |